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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숙의 나홀로 극장] <문라이트>, 한 편의 시를 읽었다
2017-03-10 02:45:08 추천 771조회수 9185
관련영화 : 문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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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문라이트>의 한 장면

 






왜 갑자기 이런 대목이 떠올랐는지 모르지만, 책 『극지의 시』의 어떤 부분이 가물가물 생각나 책장에서 꺼내 찾아 읽었다. 삶이 쓰라리다고 느낄 때, 이성복 시인의 3부작 명상서(내 멋대로 나홀로 붙인 장르명)인 『무한화서』, 『불화하는 말들』, 『극지의 시』를 아무 페이지나 넘기며 마음을 달래거나 무릎을 치거나 하는데 말이다.

 

영화 <문라이트>를 이야기하려는데 번뜩 이 에피소드가 떠오른 것이다.

 

“시가 우리한테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건 우리로 하여금 화자의 자리에 서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 해요. 시적 감동이란 독자가 화자의 자리에 서서, 화자의 눈으로 보고 느낄 때의 놀라움, 서러움, 막막함 같은 것이 아닐까 해요. 제가 시 창작 수업 들어가서 늘 하는 얘기가 있어요. 인터넷에서 본 초등학생 답안지인데, 어른이 아이에게 선물을 주는 그림이 있고, 그 밑에 다섯 자 들어가게 빈칸이 있어요. 문제는 ‘이럴 때 뭐라고 합니까?’ 거기에 적힌 답이 ‘뭐 이런 걸 다......’예요. 그리고 한 아이가 막 지나가려 하는데 다른 아이가 흙장난을 하는 그림이 있어요. 문제는 똑같아요. ‘이럴 때 뭐라고 합니까?’ 답은 ‘씨발아, 비켜라.’ 이 답안을 보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쓴 아이의 자리에서 아이와 같이 생각하는 거예요. 단, 이 대답들이 재미있기만 하고 시가 안 되는 건 그 안에 ‘아픔’이 없기 때문이지요.”

 

나는 <문라이트>를 보며 왜 이다지 먹먹했는가. 지금 이 순간도 주인공 샤이론의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흑인/ 편모 가정/ 남성/ 게이인 샤이론의 자리와 내 삶의 자리는 멀리, 어쩌면 반대의 지점에 놓여 있는데, ‘아픔’은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문라이트>가 이성복 시인이 말한 예시로서, 바로 그 자리에서 시가 되었다. 그의 처지가 특수해서 전해지는 아픔이 아니라 우리 모두 삶의 과정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차별과 소외,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사랑의 아픔이기에.

 

올해 오스카 작품상을 수상한 <문라이트>는 한 편의 뛰어난 시다. 3부로 구성된 성장담은 1부 리틀, 2부 샤이론, 3부 블랙이란 제목으로 10여 년 주인공의 삶을 보여준다. 그 삶은 가난과 왕따 차별과 억압과 박해가 그대로 느껴지지만 내면을 표현한 영상은 아름답고 감각적이어서 눈과 마음을 한꺼번에 사로잡는다.

 

마이애미의 새파란 바다에서 수영을 배우는 샤이론의 머리 위로 부서지고 빛나는 물과 햇살, 검은 하늘을 천천히 걸어가는 샤이론의 등 뒤에 푸른빛 도는 대기, 쫓기며 달리는 샤이론 발밑 황토빛 흙, 그리고 순수한 사랑의 시작이었던 친구 케빈과 첫 키스를 나누며 움켜쥐던 모래 더미는 영상 컷 그대로 액자로 만들고 싶을 정도다.

 

영화 제목도 기막히지 않은가. <문라이트(Moonlight)>, 원작인 희곡, ‘달빛 아래 흑인 소년들은 파랗게 보인다’에서 나왔다. 극작가 타렐 앨빈 맥크래니의 자전적 희곡을 젊은 감독 배리 젠킨스가 영화화한 것. 피부색 차별 없이 비추는 달빛 아래에서 우리 모두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어둠 속에서 자란 한 소년이 청년이 되어, 결국 마약거래상이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사랑을 찾아 고백하는 순간까지 어두운 삶의 톤은 푸른빛을 버리지 않는다. 영화 <문라이트>가 시로 받아들여지는 건 아마도 통렬한 고발이나 어쭙잖은 세속의 성공, 아픈 복수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허약하고 슬픈 눈빛의 샤이론이 근육질의 블랙으로 태어나는 순간에도, 그에게는 세상에 대한 복수심보다는 사랑에 대한 그리움과 후안과 그 여자친구 테레사와 맺은 유사 가족의 따뜻함을 간직하고 있는 듯했다.

 

나에게 <문라이트>는 또한 ‘후안과 테레사’의 영화이기도 하다. 도망쳐 자신의 창고로 숨어든 겁먹은 소년, 답답할 정도로 입을 열지 않는 샤이론을 후안은 어떠한 의문도 품지 않고 집으로 데려가 먹이고 달랜다. 그의 아름다운 여자친구 테레사의 배려의 태도는 이름에서 연상되듯 테레사 수녀의 사랑처럼 아무것도 캐묻지 않고 돌보는 것. 눈시울 촉촉하게 만드는 ‘묻지마 사랑’이었으니, 나 누구에게 이토록 뜨겁게 배려한 적 있었나 싶어서 크게 마음 출렁거렸다. 대가 바라지 않는 깊은 사랑, 어떤 순간만 사랑의 발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샤이론의 성장 내내 곁에 있어준 후안과 테레사에게서, 영화 제목인 푸른 달빛의 상징을 보았다.

 

달빛 속 샤이론의 고백 “너무 많이 울어서 눈물 방울이 되어버릴 것 같다”는 슬픔에 잠긴 한 인간만이 표현할 수 있는 시적 은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출구 없는 갇힌 삶에서도 자신의 삶을 버리지 않는 샤이론의 말간 고백을 들으며 이성복 시인의 말들이 떠올랐다.

 

“거미 같은 곤충을 보세요. 자기 몸속에서 토해낸 실을 밟고 공중으로 옮겨가잖아요. 그처럼 이 길은 오직 우리 자신 속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어요.”

 

나는 샤이론 쪽 삶의 길에 서 있기에 처지가 사뭇 다르지만 테레사 쪽 삶의 길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을까 조심스레 묻는다. 희망을 가진 채. 다른 것들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보리라고. 자신 속에서 길을 낼 수 있다면. 영화 <문라이트>와 책 『극지의 시』를 겹겹이 읽은 초봄의 밤이 이렇게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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