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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웅 영화경] <퍼스트 카우> 옛날 옛적 서부에도 우정이 존재했다

2021-10-29 오전 2:45:03 추천0 조회수292

영화 <퍼스트 카우>의 한 장면

‘서부극 Western’이라고 하면 보통 떠오르는 이미지와 설정이 있다. 백인 주류 남성들이 말을 타고 서부 벌판을 이럇이럇 소리 지르며 격하게 달리고, 문명사회를 건설하겠다며 폭력을 앞세워 아메리칸 원주민을 제거하고, 그게 영웅적인 행동이라도 되는 양 이글거리는 태양을 배경 삼아 서부 사나이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마지막 장면 등이 그렇다. 말하자면, 미국의 서부극은 개척을 빌미로 폭력과 살육에 면죄부를 주는 무법의 알리바이였다.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퍼스트 카우>는 기존 서부극의 세계관을 완전히 뒤집어진 형태로 접근하는 작품이다. 카우보이모자를 눌러 쓴 서부 사나이도 등장하지 않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질주하는 적토마도 배제되어 있고, 총으로 의기투합하는 ‘싸나이’의 의리 따위도 없다. 대신, 비스킷을 구워 시장에 내다 파는 남자들이 있고, 젖소 한 마리가 나무에 묶여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풀이나 뜯고 있고, 다친 동료를 걱정하는 마음이 영화의 주된 정서로 작용한다.

유대인 쿠키(존 마가로)는 모피 사냥꾼들 팀에서 식량 배급을 담당하고 있다. 여정이 길어지고 식량이 떨어지면서 사냥꾼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위협받는 쿠키는 어느 날 추위에 벌벌 떠는 중국인 이민자 킹 루(오리온 리)를 발견한다. 그에게 먹을 것과 잠자리를 제공한 것을 인연으로 두 사람은 몇 년 후 다시 만나 함께 소박한 사업을 꾸린다. 리가 망을 보는 동안 쿠키가 마을의 유일한 젖소의 젖을 몰래 짜서 그걸 가지고 비스킷을 만들어 판매하는 것.

맛있다고 소문이 나면서 쿠키와 리는 돈을 손에 쥐게 되고 이 기회를 노려 샌프란시스코로 이사 갈 계획을 세운다. 젖소는 영국 출신 군인 대령의 것으로 쿠키와 리는 평소처럼 늦은 밤 몰래 젖을 짜다가 망을 보던 리가 나무에서 떨어지면서 걸려 쫓기는 신세가 된다. 죽지 않으려 필사의 각오로 도망치던 둘은 뿔뿔이 흩어져 제 갈 길을 가게 된다. 각자도생의 시도를 의심할 법도 하지만, 둘은 극적으로 다시 만나 평소처럼 함께한다.

<퍼스트 카우> ‘새에게는 둥지, 거미에게는 거미줄, 인간에게는 우정’이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지옥의 격언> 중 한 문구를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백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소외되거나 적으로 간주되는 서부 세계에서 쿠키와 리는 주류 백인 남성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서로에게 날카로운 의심의 창을 겨누기보다 우정을 은신처 삼아 따뜻하고 포근한 자신들만의 소우주를 건설한다.

“우리들의 집은 우정이 있는 곳이다.” 켈리 라이카트 감독이 표현한 영화의 메시지처럼 <퍼스트 카우>에는 피가 난무하는 총격전이나 추격전이 후반부에 잠깐 등장할 뿐이고 쿠키와 리의 인종을 넘어선 우정 묘사가 러닝 타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몸에 걸친 옷도 없이 쫓기는 자신에게 친절을 베푼 쿠키를 잊지 못하던 리는 쿠키가 거처 없이 지내는 것을 알고는 혼자 지내기 좁은 집으로 불러 함께 살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영화가 배경으로 삼은 1820년대는 무언가를 사고팔고 함으로써 소유가 핵심이 되는 자본주의가 막 시작되던 때다. 그래서 쿠키와 리처럼 소유보다 공유에 밀착한 우정은 자본주의와 일종의 대척에 서는 개념이다. 쿠키와 리가 젖소의 젖을 짜는 건 훔친다기보다 나눈다는 의미에 더 가까웠고 그를 증명이라도 하듯 젖소 또한 주인보다 쿠키에 더 밀착하고 애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자본주의에 도움이 되지 않는 우정, 특히 서부 사나이의 폭력이 법처럼 용인되는 사회에서 쿠키와 리의 관계는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고 붙어 지내는 한 위협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허락된 우정의 크기는 함께 사는 집의 규모 정도다. 그 집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쫓겨나 내어줘야 하는 까닭에 쿠키와 리가 우정을 지속한다는 건 목숨을 걸어야 가능한 일이다.


영화 <퍼스트 카우> 공식 포스터

<퍼스트 카우>는 이제는 생소한 경험이 된 35mm 필름 카메라 촬영에, 화면비는 표준 비율로 통하는 1.37:1을 채택했다. 2.39:1의 시네마스코프처럼 화면비를 늘리거나 아이맥스와 같은 특수 카메라를 사용한 요즘 영화와 다르게 작아서 소박하고, 꾸미지 않아서 잊힌 가치를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다. 쿠키와 리의 우정을 반영한 촬영과 화면비는 ‘집’ 바깥의 보이지 않는 덫을 피해 이들이 지금의 관계를 지속하기를 바라는 영화의 마음을 담은 셈이다.

켈리 라이카트에게 영화 만들기는 우정 쌓기다. <퍼스트 카우>의 원작은 조나단 레이몬드 작가의 『The Half-Life』이다. 조나단 레이몬드와의 인연은 켈리 라이카트의 두 번째 장편 <올드 조이>(2006)로 시작해 다섯 작품을 하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관련해 켈리 라이카트는 “우정이 핵심에 자리 잡고 있는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많은 친구와 함께 일하며 우정을 느낄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라고 전했다. <퍼스트 카우>는 국내에 정식 개봉하는 켈리 라이카트의 첫 번째 영화다. 켈리 라이카트의 세계관을 이해하고 진가를 확인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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