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허남웅 영화경] ‘와라나고’를 기억해, 좋은 영화를 부탁해

2021-11-05 오전 2:45:02 추천0 조회수181

영화 <이터널스>의 한 장면

<이터널스>의 개봉(11월 3일) 당일 예매율이 88.6%다. 티켓을 예매하고 극장을 찾는 관객 10명 중 9명 정도가 <이터널스>를 관람할 거라는 의미다. 한국 관객이 마블의 슈퍼히어로물을 유독 좋아한다고 해도 납득하기 힘든 수치다. 보통 멀티플렉스는 선호도가 높은 큰 규모의 영화 위주로 사전 예매율을 고려하여 스크린을 배정한다. 그러다 보니 <이터널스> 외의 다른 영화를 보려고 극장을 찾으려는 관객의 선택지를 일방적으로 지워버린다.

하루 이틀 제기된 문제는 아니다. 얼마 전, <고양이를 부탁해> 재개봉과 <와이키키 브라더스> 개봉 20주년 기념회가 열렸다. 각각 2001년 10월 13일과 27일에 개봉했던 두 영화는 관객이 많지 않다는 이유로 극장에서 일주일을 버티지 못하고 조기에 종영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던 <나비>와 <라이방>까지, 좋은 영화라는 평가에도 불구, 극장 상영 기회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면서 영화 팬들은 배급의 불공정한 처사에 관객 운동으로 응수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라이방><나비><고양이를 부탁해>의 제목 머리글자로 이름 지은 ‘와라나고’ 운동은 한국영화사에서 관객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행동으로 이뤄진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와라나고를 지지하는 팬들은 이들 영화를 극장에서 보고 싶어도 상영하는 스크린이 없으니 재개봉 형식으로 다시 상영해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멀티플렉스는 소극적이었고, 다양성 극장과 예술영화관을 중심으로 와라나고의 상영이 소규모로 이뤄졌다.

네 작품 중 <고양이를 부탁해>와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최고의 한국 영화를 묻는 설문과 전문가들의 평가 목록에서 늘 빠지지 않는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고교 졸업 후 사회에 진출하여 혼란해 하는 네 명의 청년을 세상에 갓 나온 새끼 고양이를 보듬듯이 끌어안는 영화다. 여성이 만든 여성 서사의 요구가 시대 정신이 된 최근 상황과 비교하여 <고양이를 부탁해>는 여성 감독이 연출한 여성 청춘 영화라는 점에서 선구적인 작품이었던 셈이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이제는 30대 중반이 된 이들이 한물간 음악 밴드 활동을 하면서 꿈과 현실의 괴리 차이로 고군분투하는 사연을 다룬다. 극 중 주인공들은 고등학교 시절만 해도 밴드 활동을 너무 사랑해 음악만 있으면 아무것도 부러울 게 없을 줄 알았다. 막상 사회에 나와 하고 싶은 음악에 종사하기에는 먹고 사는 일이 요원하고, 그렇다고 음악을 포기하기에 바친 시간과 열정이 너무 아깝다.

웬만해서는 주목하지 않는 사회적 약자를 주인공으로 한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겉보기에 너절한 삶일지라도 나름의 의지를 가지고 꿈을 간직한 채 버티는 삶에 관해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낸다. 극 중 인물들의 추락한 삶까지는 아니지만, 바랐던 꿈과 거리가 있는 생활을 하며 벅찬 현실에 맞서고 있는 이들에게 <와이키키 브라더스> 같은 작품은 진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영화는 현실에서 실현 불가능한 판타지와 같은 ‘꿈 dream’을 다루면서 사람들이 이루고자 노력하는 ‘꿈 vision’을 응원하는 매체이다. 전자가 <이터널스>와 같은 작품이라면, <고양이를 부탁해>, <와이키키 브라더스> 등의 영화가 후자에 해당한다. 어느 쪽이 더 가치 있는지 이들 영화를 받아들이는 개별의 관객과 평단과 극장 종사자마다 기준이 다르다. 현재의 극장가는 수치가 절대적인 표준처럼 군림하며 소수의 큰 영화가 독식하는 시장으로 전락했다.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공식 포스터

높은 수치가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은 <고양이를 부탁해>의 재개봉과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20주년 기념 상영회가 증명한다. 와라나고 운동을 통해 다시 상영 기회를 얻은 <와이키키 브라더스> <고양이를 부탁해>의 최종 관객 수는 각각 3만, 12만 정도였다. 적은 관객 수에도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작품에 관한 재평가가 이뤄지면서 20주년이 되는 올해까지 잊히지 않고 세월을 초월하여 사랑받는 영화로 입지를 굳혔다.

특정 영화가 멀티플렉스의 스크린 수를 80~90% 이상 장악하는 건 관객의 선호보다는 배급의 의도를 반영했다고 봐야 한다. 영화를 상품으로 대하는 배급의 욕망은 한몫 잡겠다는 장삿속을 박스오피스의 수치로 위장(?)하여 관객의 선택인 것처럼 선전한다. 하지만 결국에 살아남는 건 예술로서의 영화다. 멀티플렉스가 외면해도 좋은 영화는 눈 밝은 관객이 주목하여 수치 그 이상의 의미와 지위를 부여한다.

비슷한 시기에 찾아온 멀티플렉스의 <이터널스>와 20주년 기념의 <고양이를 부탁해>,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보며 든 단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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